24개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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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1954년 영화.
영화는 1928년 일본 세토 내해의 한 낙도 분교에 부임하는 여교사와 그녀가 담임을 맡은 1학년 학생 12명과의 20여년간의 긴 인연을 담은 드라마이다. 기노시타 감독이 만든 영화중 가장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며 스스로도 본인의 필모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언급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1954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10에서 1위에 선정되었으며 당해 일본개봉 영화중에서 관객,평단,언론의 주목을 모두 끌어모았다. 이후 키네마 준보를 비롯한 각종 영화 매체는 이 영화를 쇼와시대 통틀어 ‘일본국민영화’로 친다. (동일년도에 개봉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는 3위에 선정.)
과장 좀 보태서 개봉후 관람한 일본 관객들 전부가 눈이 퉁퉁부어 극장을 나선 장면이 주요 일본의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일본 최루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2. 시놉시스[편집]
3. 등장인물[편집]
교사로서의 자긍심을 놓치지 않고 오직 가르치는 아이들만 생각하는 헌신적인 스승의 모습. 그러나 그녀의 아이들은 가난과 빈곤으로 상처받고 도시로 팔려나가거나 생계일에 학교마저 중도에 그만두는 아이들이 늘어만 간다. 이런 제자들의 상황에 눈물을 흘리며 가슴아파 하지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현실적인 한계에 더욱 좌절하게 된다.
- 미사키 분교 남자선생님(크레딧 기재상)(류 치슈)
- 미사키 분교의 오이시 선생님의 12명 제자들 - 극중 이름(실명/"극중 별명")순
4. 제작비화[편집]
1952년에 발표한 츠보이 사카에의 동명소설 “24개의 눈동자”를 각색하여 영화화한 작품이다. 1952년에 원작소설 발표직후 기노시타 감독은 소설을 접하고 바로 영화화를 결정하고 쇼치쿠에 영화기획을 알린다. 당시 같은 종류의 일본 영화치고는 제작기간이 유별나게 긴 편이었는데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24명의 아역들의 학교 수업일정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 방학기간동안 촬영해야 했고 아역 12명과 이들이 성장해 청소년기의 배우들 12명, 성년기의 배우들 6명의 캐스팅과 촬영등을 병행해야 했음으로 제작기간이 유례없이 1년을 약간 넘겨버린 것이다.
당시 기노시타 감독이 직접 각색을 했는데 1952년 12월에 원작소설발표, 1953년 3월 촬영및 제작시작, 1954년 3월 촬영종료 및 후반기 작업시작, 1954년 9월 개봉으로 살인적인 제작스케줄이 이어져서 각색작업이 엄청난 스피드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더군다나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그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가 역시 주연을 맡은 “여자의 정원”도 감독하여 한창 촬영중이었다. 1953년에 2개 영화를 동시에 제작하고 있던 것이었다. 쇼치쿠 내에서는 “역시 천재감독은 다르다” 라며 한동안 기노시타 감독의 제작능력을 칭송하는 평판이 돌았다고. 그도 그럴것이 “여자의 정원”이 1954년 3월 개봉, “24개의 눈동자”가 당해 9월 개봉 예정이었으니 쇼치쿠 내부에서도 과연 예정대로 개봉이 될 수 있을지 염려가 팽배했던 것. 그러나 보란듯이 개봉일정을 예정대로 모두 맞췄고 “24개의 눈동자”와 “여자의 정원” 둘다 나란히 키네마 준보 1위,2위를 독식하며 작품성 또한 인정받았으니 쇼치쿠가 괜히 “천재감독” 운운한게 아닌듯하다. (더군다나 그때 3위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였다. 쇼치쿠 100주년 기념 홈페이지https://movies.shochiku.co.jp/100th/nijushinohitomi/에서는 “24개의 눈동자”를 홍보하면서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를 앞선 작품성”이라고 대놓고 홍보하고 있다. 해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위상을 생각하면 쇼치쿠의 이런 치기어린 패기가 어이없을 뿐.)
아역을 맡은 배우들 캐스팅도 당시에 주목을 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 역할로 12명, 그리고 6학년 역할로 12명 모두 24명의 아역들을 캐스팅해야 했는데 쇼치쿠가 일본 전역에서 닮은 형제,자매들로 3600조, 7200명의 일반 아이들을 수소문해서 사진촬영, 테스트를 거쳐 12조 24명을 최종 캐스팅했다. 그 당시에는 이런 대규모 캐스팅, 더군다나 아역에다가 외모가 닮고 5-6년 터울의 형제,자매를 선발하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었기에 쇼치쿠의 기획부서는 캐스팅에 진땀을 뺐다고. 거기다가 성년 역할을 해야하는 배우 6명도 일단 연기력은 뒷전이고 외모가 비슷해야 하는게 1순위여서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인 인연 덕분인지 몰라도 이때 출연했던 아역들이 아직까지도 모여 동창회(?)를 열며 서로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모임의 이름은 “눈동자회”. 이들중 다수가 기노시타 감독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여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이 회상하는 “24개의 눈동자” 촬영현장은 학교에서 보냈던 시간들과 똑같을 정도로 즐거웠던 추억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고 한다.
5. 평가[편집]
“Twenty-Four Eyes”, the film's anti-war message is "aimed more directly at Japan" compared to films with a similar message by Yasujirō Ozu or Akira Kurosawa.
“24개의 눈동자”의 반전메시지는 오즈 야스지로나 구로사와 아키라의 비슷한 비판메시지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일본을 겨냥하고 있다.
― 오비 복, 영화학자
Kinoshita desires to make the basic decency of one woman [Ōishi] stand in opposition to the entire militarist era in Japan.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일본의 어두운 군국주의 시대에 저항했던 한 여성(오이시)의 고결한 품격을 (이 영화를 통해) 세우고 싶어한다.
― 데이비드 데서(David Dessert), 일리노이 대학 영화학과 교수 및 미 시네마 저널 편집장
"Sentimental but sincere."
감상적이지만 진심인 영화
― Empire 매거진
“24개의 눈동자”를 기노시타 케이스케의 최고작로 뽑기에는 충분히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대중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았던 작품(일본영화)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중략) 시대의 아픔에 직면한 이들의 슬픔을 강조하는 영화의 순진한 시각은 어떤 이들, 이를테면 좀더 강직한 누벨바그 세대 감독들에게는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될 만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영화가 당대 일본 관객에게 감동을 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씨네21
일본내에서의 평가는 “진부한 최루성 영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지만 해외의 평가는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태평양 전쟁중에 발표한 초기 4작품 - “꽃피는 항구/花咲く港“,”살아있는 마고로쿠/生きてゐる孫六“,”환호의 도시/歓呼の町”,”육군/陸軍“ 과 연관지어 영화를 분석하려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도 그럴것이 해외 평론가들의 평론이 대부분 이들 초기 4작품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중 크라이테리온을 통해 발매된 것은 초기 4작품과 나라야마 부시코, 오손 가족을 위한 아침, 그리고 24개의 눈동자 뿐이다.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미조구치 겐지의 작품들 대부분이 크라이테리온을 통해 해외에 소개되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운 부분)
5.1. 비판[편집]
한정선 고려대학교 국제학부 조교수는 동북아역사논총에 기고한 학술기고문을 통해 “24개의 눈동자”가 일본의 전후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식을 지우는 것에 노력에 일조한게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한정선 조교수는 일본의 ‘반전주의’와 ‘평화주의’가 인류 최초의 원폭 피해자라는 트라우마에 의존한 ‘피해자 의식’속에서 탄생된 것이라고 전재하고 전쟁의 서사구조에서 여성은 “전쟁가치에 반대하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묘사되기에 “24개의 눈동자” 영화의 주인공인 오이시 선생은 서사구조에서 부여받은 직위인 여성상-어머니에서 일본 국민을 위해 대신 울어주는 “곡쟁이”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다소 과격한 비판을 제시하였다.
전쟁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여성,‘상처받지 않은 모’로 수렴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여성은 전시에는 후방에서 파괴와 상실에서 오는 고통을 인내하는 자로, 전후에는 폐허 속에서 인고하며 동시에 상처받은 남성성을 위로하는 자로 설정된다. 다시 말하면,‘상주’일본에 의해 고용된‘곡쟁이’로서 전후 여성상이 설정되었다. 이처럼 인고하며 대신 울어 주는 여성성은 패전으로 ‘거세’된 일본의 남성성이 여성의 신체에 투영되면서, 즉 남성성 내부의 원치 않는 부분이 여성 타자에게로 이전되면서‘상처받은 남성성’이 치유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러한 치유과정은 평화와 반전이라는 새로운 일본국가와 사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필요조건이기도 하였다. 전후 일본의 영상매체는 이와 같은‘상처받은 남성성’의 치유를 위한 수단으로‘상처받지 않은 모’라는 전후 여성성 재정립을 시도하였고, 이를‘감상적 상상력(melodramatic imagination)’을 통해 극적으로 재현하였다….
눈물에 호소하는 감상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전후 일본의‘반전’과‘평화’의 감수성을 시각화하는 데 성공한 고전적인 영화 중의 하나가 바로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24개의 눈동자」이다. 기노시타 감독은 감상성의 극대화를 통한 반전사상을 고취하려던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여성의 눈물로 만들어진 감상적 공동체의 기본 정서는 유년기의 순진함 그리고 이 순진함에 대한 향수다. 이는 영화와 드라마 모두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삽입되는 유년기에 찍은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유년기의 사진이 만들어 내는 순진한 이미지는 한편으로는 일반 일본인들은 국가와 군이 행한 전쟁 범죄로부터 결백하 다는 증언을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시각화된 순진함은 동시에 과거에 행했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 현재를 살아가고 싶다는 오늘날 일본인의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 한정선 “전후 일본의 곡쟁이 - 일본 “반전” 영화에 나타난 여성
5.2. 반론[편집]
일본의 패전 이후로 일본사회에 “반전주의”와 “평화주의” 정체성을 성립하는 것에 “비극적 개체”로서 여성과 여성의 눈물이 크게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일본이 패전 이후 “전쟁을 반성하고 평화를 추구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위에서 세워진 것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일본의 전후 세대가 과거 일본제국시절 자행된 전쟁범죄에 대한 인지와 반성을 회피하려는 경향은 확실히 존재하며 이는 일본이 패전이후 확실한 전쟁범죄에 대한 청산과 단죄를 하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임이 명확하다.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 및 전쟁범죄회피를 논하면서 1954년에 개봉한 일본영화에게 책임을 지우는 게 옳은 일인가는 여전히 의문이 붙는다. 영화로만 놓고 1950년부터의 일본을 평하자면 전후 패전의 영향과 미 점령군의 가혹한 검열통제로 인해 일본 영화 제작과정에 사실상 과거 제국주의 미화,찬양,부활주장등이 들어갈 여지는 적어도 1960년대 말까지는 원천 차단되었다.
위 주장에 힘을 싣는 사례는 오히려 1954년 “24개의 눈동자” 이후 리메이크 작들에게서 발견된다. “24개의 눈동자”는 11개의 리메이크작이 나왔는데[6] 일본에서 11번의 리메이크 작이 탄생한 영화는 “24개의 눈동자”가 유일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가장 최근의 리메이크 작은 테레비 아사히에서 2013년 제작방송한 TV드라마 시리즈 <24개의 눈동자/제목동일>로 마츠시타 나오가 주연으로 등장한 작품이다. 1954년작과 비교해보면 이게 같은 원작에서 나온 리메이크 작인가 생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다른데, 기노시타 감독의 원작에서 거침없이 표현되었던 반전,사회비판 등의 부분은 모두 사라지고, 외딴 섬 분교의 아름다운 추억등이 중심이 되는 그냥 드라마로 바뀌었다. 1954년 원작이 가지고 있던 반전,평화지향 사상등은 이후 11번의 리메이크 작들에게서 점점 축소되거나 왜곡되어져 왔으며 가장 최근의 리메이크 작은 아예 평범한 범작도 못되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위 한정선의 논문에서도 우경화된 일본 사회의 분위기을 반영하여 원작 드라마에 담겨있던 반전과 사회비평 분위기가 점점 낮아졌음을 지적하는데 그 지적방향을 살펴보면 전쟁을 겪은 세대에서 겪지 못한 세대로 이행함에 있어 과거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대한 명확한 반성과 철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회현상임을 알아야 한다.
6. 기타[편집]
- 이 영화의 원작자부터 제작자,감독,제작스태프 전부를 포함하여 여자주인공(다카미네 히데코)까지도 모두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몸소 겪었던 사람들이다. 일부 아역들 역시도 일본 패전 이전에 태어났음으로 영화 제작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전쟁의 참혹한 시기를 겪어보았던 터라 영화가 가지는 강한 반전메시지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고 한다.
- 사실 츠보이 사카에의 원작 소설에는 지명을 포함해 일절 배경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세토 내해 어느 섬마을' 정도로 서술되어 있으나 원작자인 츠보이 사카에의 고향이 쇼도시마초라서 기노시타 감독이 영화의 무대를 쇼도시마초로 골랐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로는 드물게 올로케 야외촬영 영화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쇼도시마초와 가가와현은 이 영화를 지역을 대표하는 영화로 아낀다. 아예 24개의 눈동자/키노시타 케이스케 박물관도 [7] 있을 정도.
- 다카미네 히데코는 이 영화 개봉 다음해 1955년 이 영화 조감독이었던 마츠야마 젠조와 결혼했다.
영화촬영때 눈이 맞았나 보다.
- 쇼치쿠의 주도로 "기노시타 100주년"기념 위원회가 2013년 발족되고 쇼치쿠에서 복원판을 제작하여 DVD릴리즈 한 바 있다. 복원은 일본의 IMAGICA 가 맡았다.
- 2006년 영국 Eureka Entertainment 에서 "마스터 시네마" 시리즈에 포함시켜 DVD릴리즈하였으며, 2008년에 크라이테리온에서도 DVD릴리스 했다. 둘다 복원판은 아니지만 영문 자막이 포함되어 있어 관람에 도움이 된다.